지난 연말에 중남미 작가의 소설을 몇 편 읽었어요. <세피아빛 초상>은 민음사TV의 ' 세문전 월드컵'을 보다가 알게된 책이에요.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중 한 권으로 칠레 여성 작가의 책입니다.
1862년 캘리포니아를 배경으로 시작되는 소설은 주인공 '아우로라'의 친할머니 '파울리나 델 바예'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파울리나는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온 칠레인 사업가로 증기선과 증기 기관차가 등장한 19세기 초 캘리포니아에서 갖가지 사업을 벌이며 엄청난 부를 쌓습니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아우로라지만 파울리나에 대한 묘사가 흥미로웠어요. 칠레 지주 집안 출생으로 '초보적인 철자법과 산수를 겨우 익힌 정도'라 묘사되지만 뛰어난 사업 수완을 가지고 있고 남편의 불륜 상대였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여배우와 노년에는 의지하는 사이가 됩니다.
자신의 아들의 딸이라며 아기의 외조부모가 어느 날 낯선 아기를 데려오자 그들의 사회적 위치를 대놓고 가늠하면서도 딸을 갖고 싶었던 젊은 시절의 마음이 커져 아이를 책임지고 키우겠다 약속합니다. 그 아이가 아우로라예요.
아우로라는 무한한 사랑을 받았던 외할아버지와의 기억이 자신의 '감정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고', 친할머니 파울리나의 집에서 자랐던 경험이 '인생의 현실적인 문제를 도와준다'고 회고합니다. 세상을 떠난 존재들이지만 그들의 영혼이 여전히 자신을 지켜준다 믿어요.
책을 소개하는 문장 중에는 칠레의 근현대사를 다룬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책에서도 1862년부터 1910년까지를 다룬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어요. 이 시기에 칠레가 겪는 볼리비아-페루 연합군과의 태평양 전쟁과 이후 일어난 칠레 내전은 소설에서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파울리나의 조카이자 아우로라에게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하는 '세베로'는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가 한쪽 다리를 잃게 됩니다. 한때 사랑했던 아우로라의 친모인 '린'의 죽음 이후 삶의 의지를 잃었던 세베로는 사촌이자 과거 연인이었던 '니베아'의 사랑으로 점차 회복하며 행복한 가정을 꾸립니다.
<세피아빛 초상>이라는 제목과도 연결되는 소재인 카메라를 아우로라에게 선물한 사람 역시 세베로입니다. 훗날 아우로라는 불행한 결혼 생활 동안 사진을 찍고 인화하며 카메라에 의지해 자신을 잃지 않고 스스로를 위한 선택을 해나가게 됩니다.
낯선 시공간 속에서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내용이 복잡하거나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아우로라의 마음을 따라가는 것이 어렵지 않았고 태평양을 가로지르고 안데스 산맥을 넘어가는 여행을 델 바예 가문과 함께 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소설의 마지막은 아우로라가 오랫동안 겪어왔던 악몽의 시작을 마주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사벨 아옌데는 자신의 소설에 자유와 기억이라는 두 가지 주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나를 이루는 핵심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야기였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