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마음 아파하지는 말자.” 내가 산아에게 말했다. “너무 마음이 아프면 외면하고 싶어지거든. 아까 우리도 말했지? 너무를 조심하자고.”
요즘 이전에 썼던 글을 다시 읽어보고 있어요. 지난 5년간은 제가 쓴 글을 읽는 시간보다 다른 누군가가 쓴 글을 읽고 새로운 글을 쓰는 시간이 훨씬 많았어요. 글을 다시 읽을 시간이 없었다기보다 제가 쓴 글을 매개로 저를 다시 보는 일이 익숙하지 않았어요.
이번 연말에는 지금까지 쓴 글을 읽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해요. 제 이야기를 다시 읽는 것이 덜 두려운 일이 되길 바라면서요. 글을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다면 공유해 볼게요.
(+) 11월에 진행되는 흥미로운 독서 모임이 있어서 소개드려요. 아직 신청 기간이 남았더라고요. DESKER에서 운영하는 커뮤니티인 '디퍼'의 리딩 테이블과 뉴스레터 '뉴닉'에서 진행하는 고슴도슴 북클럽이에요. 유료 프로그램이지만 책 읽기를 즐기는 분들과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좋은 프로그램이라 느껴졌어요. 관심 있으신 분들은 링크를 참조해 주세요.
김금희 작가의 <대온실 수리 보고서>
작년 이맘때쯤 읽었던 책이에요. 다시 읽어봐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확히 1년 만에 읽게 되었어요. '대온실'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한 역사 소설이기도 하고 주인공 영두가 자신의 한 시절을 마주하며 회복하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이기도 해요.
100여 년을 거친 거대한 서사가 적지 않은 분량으로 이어집니다. 처음 읽었을 때는 전체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쉽지 않았어요. 다시 읽을 때는 처음 읽을 때 밑줄 쳤던 문장을 천천히 읽으면서 왜 이 문장들이 좋았나를 생각해 봤습니다.
김금희 작가의 <첫 여름, 완주>를 읽으며 느꼈던 감정과도 비슷한 부분이 많았어요. 석모도에서 나고 자란 영두가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니며 느꼈던 낯선 물의 냄새와 봄이라는 계절에 커지는 고립감에 대해서도 공감이 되었습니다.
비밀을 담고 있는 대온실의 구조를 따라가며 영두의 무너진 마음 역시 다시 지어지는 과정을 겪습니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의 첫 페이지 두 번째 문장은 건축 용어인 중수와 중창과 재건을 언급합니다. 각 용어는 수리의 정도에 따라 달리 쓰는 단어예요.
중수가 건축물의 골격을 유지한 채 개조하는 것을 뜻한다면 중창은 건축물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기 위해 다시 짓는 것을 뜻합니다. 비슷한 의미의 재건은 일반 건축물 수리에 사용되는 용어로 건축물 일부 또는 전체를 철거하여 종전의 범위 내에서 건축물을 짓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두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제 기억 속 어디가 부서지고 어느 곳에서 부식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보게 되었어요. 중수와 중창과 재건 중 제 마음에 필요한 수리는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책을 덮었습니다. 지난 한 달 동안 '억울함에 갇혀서 나 자신을 해치지 말자'라는 영두의 말을 자주 되새겼어요.
억울함에 종종 갇힐 때마다 수리가 필요한 마음의 어느 부분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를 해치지 않도록 마음의 설계도를 따라 수리 작업을 진행해 보려고 해요. 단단해진 마음으로 오랜 기억을 되돌아 볼 수 있을 때까지요.
하지만 나는 추웠고 그건 몸을 덥히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나를 안정적으로 눌러줄 얼마간의 무게가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나 같은 건 누군가 놓친 유원지 풍선처럼 날아가 버려도 그만일 테니까. 대문 밖만 나가면 아는 얼굴들이 나타나는 섬과, 사람 물살을 헤치고 다닐 때마다 생소한 얼굴들이 차고 슬프게 다가왔다 사라지는 이곳의 봄은 완전히 다른 계절이었다.
나는 좋은 부분을 오려내 남기지 못하고 어떤 시절을 통째로 버리고 싶어하는 마음들을 이해한다. 소중한 시절을 불행에게 다 내주고 그 시절을 연상시키는 그리움과 죽도록 싸워야 하는 사람들을.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그 무거운 무력감과 섀도복싱해야 하는 이들을. 마치 생명이 있는 어떤 것의 목을 조르듯 내 마음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을 천천히 죽이며 진행되는 상실을, 걔를 사랑하고 이별하는 과정이 가르쳐주었다.
“산아야, 더 억울해지는 건 그 억울한 일에 내가 갇혀버리는 일 같아. 갇혀서 내가 나 자신을 해치는 것.” 산아는 고개를 들고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았다. 얼굴을 적신 눈물이 어둠 속에서도 눈길처럼 반짝였다. “이모는 하루 마감하면서 가끔 이렇게 기도한다. 오늘 다행히 아무도 안 죽였습니다.” 산아가 어이가 없는지 약간 웃었다. “그럼 하느님이 칭찬하셔?” “침묵하시지, 기도는 답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다리기 위해 하는 거니까.”
저널테라피: 대화형 쓰기와 '보내지 않는 편지'
최근 곽정은 작가의 <어웨어니스>를 읽고 있어요. 전작인 <마음 해방>을 읽으며 '활동 모드'와 '존재 모드'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웨어니스>에서는 존재하는 모드로 살아가는 방법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요. 특히나 곽정은 작가가 '저널테라피'를 실천하며 느낀 점을 공유한 부분이 좋았어요. 저도 시도해 보고 싶은 두 가지 방법을 안내드려요.
1️⃣ 대화형 쓰기는 내 안에 존재하는 생각과 스스럼 없이 대화할 수 있도록 장을 여는 기법이다. 예를 들어 너무도 불안할 때, 내가 그 불안과 함께 대화하는 것을 상상해볼 수 있다. 내 안의 나와 불안을 구별해,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한다. 종이를 꺼내 '왜 불안해?'라고 묻고, '불안'이 그에 답하는 식으로 기록해 본다.
2️⃣ 말 그대로 편지를 쓰기는 하지만, 누군가에게 보내기 위한 것은 아니다. 편지에 특정 인물을 향한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과정에서 나의 기억과 감정을 돌아본다. 보내지 않을 편지이니 감정을 더 깨끗하게 털어놓을 수 있고, 결과적으로 감정의 정화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위에서 소개한 두 가지 글쓰기 방식이 존재 모드를 연습하는 시간이 되기 위해 조언한 부분도 인상 깊었어요. "먼저 저널링을 하기 전에 몸을 고요히 하는 시간을 확보하기로 했다. 긴장이나 불편감이 드는 바로 그 순간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충분히 걷기명상이나 산책을 한 뒤에 마음을 기록했다."
책에서는 이렇게 기록한 내용을 다시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쓰기와 읽기를 통해 존재 모드의 스위치를 켤 수 있는 시간 보내보시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