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를 처음 완독해 봤어요. 일주일간 (전자책의) 예쁜 표지를 넘겨 밀도 높은 글을 읽었습니다. 민음사 편집부에서 제작하는 '릿터' 54호 주제는 '나르시시스트'였어요. 나르시시즘에 대한 문학적 해석과 신작 단편 소설과 시 등 다양한 종류의 글을 읽으며 언어의 해상도가 높아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유튜브에서 나르시시스트 구별법 및 대처하는 방식에 대한 영상이 자주 알고리즘에 떴어요. 나르시시스트가 사용하는 말투부터 나르시시스트 부모가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과 나르시시스트에게 착취당하는 사람의 특징을 나열하는 썸네일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나르시시스트에 대한 흥미와 공포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현대소설 연구자인 오자은 교수는 글 '문학적 나르시시즘과 나르시시즘점 사회'에서 이를 설명합니다. 현실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나르시시스트의 전형은 문학 세계에서 끊임없이 재현됩니다.
"자신의 자아를 위축시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제거하려 하는 나르시시즘적 인물이 독자에게 강한 흥미를 유발한다는 것은 이미 프로이트가 지적한 바 있다. 독자들이 오래 전에 일정 정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리비도를 초지일관 유지하고 있는 그들의 자족적인 행복한 세계가 그 자체로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넷플릭스 시리즈인 <베이비 레이디어> 속 인물들을 임상심리 전문가의 시각으로 구성한 '왜곡된 파편들 헤아리기 - <베이비 레인디어> 속 나르시시즘의 비극'이라는 글도 흥미로웠어요. <베이비 레인디어>는 드라마를 제작하고 연기한 리처드 개드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글에서는 주요 인물인 마사 스콧, 도니 던, 대리언 오코너를 차례대로 분석해요. 이들이 가진 나르시시즘이 어떤 방식으로 상대를 착취하고 어떤 이유로 상대에게 강렬히 매혹되게 만드는지를 설명합니다. 글을 읽으며 주인공 도니가 겪는 트라우마적인 상황에 일정 부분 공감이 되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짧은 소설인 <송자운의 말버릇>도 즐겁게 읽었어요. '자신에게 미묘한 신호를 보냈다고 언급하는 사람들에게 진짜로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이 보내는 모든 언어와 비언어가 자신을 향한 관심이라고 생각하는 걸 좋아한다고 이해해야' 그의 산만한 어필을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인 '송자운'은 연애 예능에 출연합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영상 속 송자운은 별다른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각오와 성량과 흥이 남다른 다른 출연자들에 비해 너무 미약했'기 때문이에요. 방송이 끝날 때까지 이를 보고 있는 화자가 머쓱할 정도로 송자운은 하나도 볼썽사납지 않습니다. 미디어가 나르시시스트를 탄생시키고 소비하는 맥락을 읽으며 씁쓸함을 느꼈습니다.
한 가지 주제를 긴 호흡으로 다루는 잡지를 읽으며 '쓰기 애호가'로서의 나르시시즘이 가득 채워지는 기분이었습니다. 학문적 개념을 다루는 글이 어떻게 문학의 세계와 만날 수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풀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고요. 다음 호에 읽게 될 이야기들을 기다리고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