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레터에서 내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물리적 세계에서 잘 다루어보자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는 표현을 썼어요. 저는 현실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스스로에게 자주 말해왔어요. 하지만 내면 세계도 현실의 일부라는 것을 간과했던 것 같습니다.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에도 비슷한 대사가 나와요. 왜 이렇게 기분대로 일을 하냐고 다그치는 '최 대표'에게 '혜진'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 할머니 화나셔서 한 음식은 혼자 드셨어요. 맛 없다고. 음식 하실 때는 항상 합장하시고 하셨어요. 기분이 좋다 싶으면 밭에서 무 하나 뽑아와서 대충 국 끓이셨어요. 맛있었어요, 별 거 안 넣었는데도. 기분? 중요해요!"
올해 만다라트에 적어놓은 저의 목표는 '감정을 회고해야 시간을 체계적으로 쓸 수 있다. 더 감각하고 덜 생각하길'이라고 썼어요. 연초에 시간은 많고 생각은 정리되지 않던 때에 쓴 문장이었어요.
그런데 이 문장을 다시 읽으며 제가 내면 세계의 현실성을 인정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물리적 세계와의 공존을 모색하기보다 내면 세계를 잘 제거해서 물리적 세계만으로 현실을 살아가자는 의도가 담겨있었습니다.
상반기를 지나면서 생각의 변화가 생겼어요. <백지 앞에서>는 내면 세계를 직면할 수 있게 도와준 책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밑줄을 정말 많이 그으며 책을 읽었어요. 소설가 최은영의 산문집인데 책의 전반부는 유기불안에 대해 깊게 다룹니다.
최근 자주 생각하게 되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유기불안과 관련이 깊다는 생각이 듭니다. 관계 속에서 버려지면 더이상 내가 살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은 무의식의 발현이 외로움이라는 감정으로 나타나는 것 같아요. 관계의 모든 문제를 예민하게 받아들이며 스스로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 같아요.
이에 대해 최은영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혼자 사는 사람은 각기 다른 층위와 종류의 애착을 자신의 중요한 이들과 형성한다." 외로움이 스스로를 파괴하기도 하지만 외로움을 느끼는 마음은 세상과의 단단한 애착을 형성하게 하는 이음새가 되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게 나눠 갖는 것이 외로움이라면 외로움은 다른 사람과 연결될 수 있는 가장 솔직하고 단단한 기반 같아요. 흘러넘치는 감정 속에서 각자의 파도를 타며 가장 깊은 외로움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